꼭 가고 싶었던 차팔라 호수, 직접 보니 공포스러웠다
머리 복잡했던 퇴사 후, 오래 그려왔던 멕시코를 드디어 여행하고자 결정했을 때도 자연 친화적인 이 나라에서 꼭 가고 싶은 곳은 ‘호수’였다. 그리고 지난 6월, 마침내 배낭 하나를 메고 멕시코 지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다는 이곳으로 떠났다.
멕시코의 대표 호수 차팔라,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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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팔라 호수(Lake Chapala)는 멕시코 서부에 위치한 할리스코(Jalisco)와 미초아칸(Michoacán) 경계에 걸쳐있는 멕시코에서 가장 큰 호수다. 국내에서는 과달라하라를 방문하는 관광객이 갈 만한 근교 여행지로, 멕시코에서는 미국인 등 외국인들이 은퇴 후 거주하는 도시로 알려져 있다.
은퇴자들, 심지어 외국인들이 와서 여생을 보내는 정도라면 이 도시는 충분히 평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다. 집 앞에 그림 같이 펼쳐져 고요히 흐르는 호수, 청명한 하늘을 그대로 담고 있을 깨끗한 물. 인터넷 속 사진들을 이리저리 찾아보며 여행을 기대했다.
마침내 인근 버스터미널에 내려 호수로 향할 때. 햇볕은 마치 내 살을 태워버릴 작정인 듯 내리쬐었다. 뜨거움을 넘어선 따가움, 마치 타투 바늘로 피부를 한 땀 한 땀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멀리 온 만큼 호수 곳곳을 둘러보고 싶어 물 가까이로 가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호수 주변을 걷다가 지쳐 식당엘 들어갔다.
호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식당은 규모가 엄청나 좌석 수만 봐도 이곳의 관광객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수기 평일 낮이라 그런지 좌석에 비해 손님 수는 소박했고, 나 같은 아시안을 오랜만에 보는지 주문을 받는 서버(알바생)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는지, 여기 놀러 왔는지 묻더니 이내 갑자기 자기 핸드폰 속 호수 사진을 보여준다.
“제가 여기서 10년 넘게 일했는데 원래는 저 호수가 이렇지 않았어요. 최근 3~5년 사이 극심한 가뭄이 와서 물이 다 마른 거예요. 원래는 물이 깊어서 가까이 가려면 다리로 지나가야 했는데, 지금은 다리 없이도 다 걸어 다니잖아요. 비도 안 오고, 관광객도 안 오고. 앞으로 이곳이 어떻게 또 변할지 모르겠어서 걱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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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앞에 기린, 저쪽엔 사자가… 여기가 바로 동물의 왕국
지난 8월 중순에 월드비전과 일주일 일정으로 아프리카 케냐로 구호 활동을 떠났다. 삼 일 동안 케냐 오실리기 마사이족 마을에서 선교 촬영하고 귀국하기 전날이 되었다. 케냐에서의 마지막 밤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이 멀리까지 왔는데 일주일은 너무 짧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혼자 남아서 여행할 용기도 없었다.
소위 동물의 왕국이란 케냐까지 왔는데 국립공원 사파리 투어는 하고 가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여행 목적이 관광이 아니고 구호 활동임을 알기에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일행 중 한국에서 함께 온 월드비전 직원도 있지만, 한국을 몇 번 다녀오며 한국말도 조금 할 줄 아는 이 곳 케냐 현지 월드비전 직원인 모세가 이번 선교 촬영하는 동안 매일을 함께하며 도와주었다. 전날 저녁을 먹기 전에 모세가 내일 오전에 사파리 투어가 가능하다고 해서 모두 가자고 했다. 기대하지 않았기에 정말 기뻤다.
아침도 굶고 떠난 국립공원 사파리 투어
나이로비 국립공원 사파리 투어는 인터넷 예약만 가능해서 모세가 인터넷으로 예약해 주었다. 1인당 100불이었다. 케냐에 오는 비용은 모두 개인 경비로 왔기에 사파리 투어 비용도 각자 냈다.
100불이 비싸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동물들이 날씨가 더우면 나오지 않아서 아침 일찍 가야 동물들을 많이 볼 수 있다고 해서 아침 식사도 하지 못하고 아침 6시에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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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로비 국립공원에서 사파리 투어는 지붕이 뚫린 차를 타고 다닌다. 차량 종류는 지프도 있었는데 우린 인원이 조금 많아서 미니 버스 같은 차 두 대로 나누어 타고 이동했다.
지붕이 뚫린 사파리용 차를 타고 가는데 여기가 더운 아프리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바람이 차가워서 바람막이 점퍼를 입고 모자까지 썼다. 케냐가 평균 해발 1700미터 고산 지대이고, 남반구가 지금 겨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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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동물의 왕국을 보면 아프리카 국립공원에서 많은 동물이 떼 지어 뛰어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파리 투어 하는 동안 동물의 왕국 정도는 아니어도 많은 동물을 볼 줄 알았다. 나이로비 국립공원은 길이 모두 흙길이라 먼지도 많이 났다. 동물들에게 친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그런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모두 어디서 동물이 나타날까 두 눈 부릅뜨고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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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린이 나타났다. 눈앞에서 걸어 다니는 기린을 보다니 가슴이 뛰었다. 동물원에서 보던 기린이 아니었다. 초원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기린을 보며 동물은 이런 자연에서 살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마리씩 함께 걸어 다니며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기린이 행복해 보였다. 다음에는 어떤 동물이 나타날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육지가 전부인 세상, 남쪽 끄트머리 ‘검은 산’ ‘붉은 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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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350km 떨어진 ‘검은 산’의 이야기는 200년 전 그곳으로 유배를 떠난 ‘손암 선생’의 붓끝에서 나왔다.
목포여객선터미널(전남 목포시 항동)에서 서쪽 뱃길로 2시간 거리의 섬이었다. 바다 위로 넓게 열린 검은 봉우리들이 짙푸른 상록수 숲을 품고 있었다. 바다 뒤로 멀어지는 어선들은 물길을 따라 조업을 나가고 있었다. 거세다던 파도는 높지 않았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이 서둘러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남 끄트머리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 많으셨습니까.”
‘흑산도 토박이’ 이영일 선생이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사람들을 맞았다. 그의 10대조 할아버지는 300년 전 흑산도에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손암 정약전의 <자산어보>(국내 최초 어류 생태도감) 저술을 도왔던 ‘흑산도 어부’ 장창대가 그의 진외가(陳外家, 아버지의 외가) 선조였다. 여행 이틀간 문화해설사로 나선 이 선생은 “<자산어보> 전문가”라는 자부심으로 나고 자란 섬의 역사를 들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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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黑山島). 검은 산과 바다로 이루어진 19.7㎢의 작은 섬. 한반도로 날아드는 철새들의 정거장이자, 서해에서 잡아 올린 생(生)홍어의 본고장. 조선 후기에는 유배인들의 귀양지로 불리었고, 21세기에는 섬 관광객들이 자처하는 ‘자발적 유배지’가 되었다. 200년 전 이곳에서 15년간 유배 생활을 한 정약전은 삶의 막바지까지 바다 동식물의 연원을 좇았다. <자산어보>는 흑산도가 품고 살아온 존재들의 모음집이었다.
최근 신안군이 태평양 섬나라들과 회의(세계섬문화다양성포럼)를 갖고 모임(태평양기후위기대응협의회)을 결성한 뒤로 흑산도는 세계인들을 위한 관광지가 되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문화체육관광부 ‘K-관광섬 육성 사업’에 흑산도가 선정되기도 했다.
이번 여행에 초대받은 주한 파푸아뉴기니 부대사와 말레이시아 대사도 그 ‘글로벌 교역’의 일환이었다. 선착장에 정박한 배들이 물살을 가르며 출발하자, 세계인들이 함께 탄 버스도 흑산도 도로를 질주했다. 훅훅 지나치는 박물관과 식당과 마을이 수백 년간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락지에 새겨진 남북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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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배에 줄무늬를 가진 사나운 새.”
17년 전 우이도(전남 신안 도초면)에서 발견된 ‘흰배줄무늬수리’가 흑산도 철새박물관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국내 유일 표본(박제본)”이라는 해설사의 설명이 눈앞의 새처럼 사람들의 귀에 박제됐다.
“덩치는 크고 무섭게 생겼지만 어린 새랍니다. 우리나라에 오는 새가 아닌데 왜 우이도에서 발견됐을까요. 조사를 해보니 무리에서 떨어져 먹이를 잘못 먹고 죽었다고 합니다.”
국내 조류 600종 가운데 400종이 흑산도를 거쳐간다. 한 번도 기록되지 않은 조류 25종도 흑산도에서 관찰된다. 천연기념물 흰꼬리수리뿐 아니라 뿔쇠오리·섬개개비·칼새 등 멸종위기종도 있다. 철새박물관은 박제된 과거의 흔적이 아닌 살아있는 자연을 대리하는 공간이다. 그곳에서 새 한 마리에서 비롯돼 후대에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었다.
누구나 맞는 죽음, 근데 그 모습이 다 같진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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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순이’. 어릴 적 나와 추억을 함께 했던 개 이름이다. 당시엔 지금과 달리 대개가 이름이 없었을뿐더러 기껏해야 거멍이‧노랑이‧덕구라 부르던 시절, 요즘으로 치자면 셔리‧챨리‧지민이 부럽지 않은 고급스러운 이름이었다.
야무지고 똑똑했다. 굳이 대문이 필요 없었다. 쥐도 잘 잡았다. 새끼를 많이 낳았는데, ‘개순이’를 흠모한 사람들이 다투어 가져갔다. 그때마다 이별이 서러워 며칠을 눈이 퉁퉁 부어 지냈다.
개순이는 16년을 살았으니, 사람 나이로 거의 90세였겠다. 천수를 누린 셈이다. 눈을 감을 때 개순이 이웃이기도 했던 집 뒤 암자 스님이 불경을 외웠다. 하얗게 눈부신 진도개였다.
섬이라는 사실이 실감 안 나는, ‘섬’
진도(珍島)는 섬이다.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그런데 섬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진도대교(珍島大橋) 때문이다. 전라남도 해남군의 화원반도와 진도군 군내면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울돌목이다. 물살이 세고 거칠다. 한자로는 명량(鳴梁)이고, 옛 이름은 돌맥이다.
병목처럼 생겼는데, 큰 물결과 커다란 파도가 좁은 해협을 만나 요동을 치며 격렬하게 소리친다. 이 거친 물살을 타고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1984년에 다리가 놓였다.
8월 24일 토요일, 진도대교를 건넜다. 예불여진도(藝不如珍島), 예술로는 진도만 한 곳이 없다, 는 섬에 들어섰다. 밭일하는 아짐은 남도들노래 한 자락 애간장 녹이게 뽑아내고, 논일하는 아재도 육자배기 정도는 할 줄 안다고 하니 그 비유가 당연하다 싶다.
이 섬에 세 가지 보물과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삼보(三寶)는 진도개와 홍주와 미역이고, 삼락(三樂)은 글씨와 그림과 노래란다. 미역이 아닌 구기자라고 했지만 내겐 미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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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여정(旅程)은 벽파진(碧波津)이었다. 고군면 벽파리에 있는 항구다. 진도와 육지를 건너는 가장 가까운 곳이 울돌목이지만, 물살이 거칠어 배를 띄우기에는 문제가 많았다.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 해남을 오가는 배는 벽파항이 최상이었다. 목포와 완도‧목포와 제주를 오가는 배들의 기항지였으며, 제주 사람들이 미역과 귤을, 쌀과 소금으로 바꾸어 간 곳도 이곳이었다.
1597년 이순신 장군은 조선 모든 수군 이끈 채 배 12척이 전부였지만, 이곳에서 명량해전 최후의 전술을 고민했다. 뒤로 높지 않은 바위 언덕에 정자 하나가 풍경처럼 서있다. 벽파정(碧波亭)이다. 1207년(고려 희종3) 처음 세워졌다. 2016년에 다시 지었다. 유배형을 받고 진도로 들어온, 제주도로 건너가는 이들의 사연과 시구가 서리맞은 감나무에 홍시처럼 주렁주렁 걸려있다.
정자 위쪽 정상에서는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忠武公 碧波津 戰捷碑)가 웅장하게 바다를 내려다본다. 눈맛이 시원하다. 해무가 낮게 깔린 바다가 한 폭의 수묵화 같기도 하다. 전첩비는 1956년 진도 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세웠다.
바위 언덕 정상을 깎아 만든 거북좌대가 볼만하다. 동양 최대 높이란다. 명량해전에서 크게 이긴 것을 기념하고 진도 출신 순절자들을 기록했다. 글은 노산 이은상이 짓고, 글씨는 소전 손재형이 썼다. 소전은 진도 출신이고 둘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소전은 ‘소전체’로 일가를 이룬 당대의 명필이었다. 서화 수집가로 문화재에 대한 안목도 높았다. 무엇보다 추사의 ‘찐팬’이었다. 경성제국대학 교수였던 후지쓰카 치카시도 추사에게 진심이었다. ‘세한도(歲寒圖)’는 말할 것도 없고 편지까지도 열심히 수집했다.
벌써 내년 여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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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월 경남 진주시에는 재미난 기억들이 많았습니다. 밤이라 더욱 풍성한 여름 잔치가 진주 곳곳에서 열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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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에 양털 같은 구름이 덩실덩실 떠 있는 8월 2일 저녁에 진주성을 찾았습니다. ‘국가유산 미디어아트 진주성 -온새미로 진주성도’ 미디어아트가 같은 달 25일까지 펼쳐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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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 중의 섬, 흑산도… 고래는 아직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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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말 8초’ 한여름, 그 섬을 다시 찾았다. 섬 중의 섬, 흑산도(黑山島). 시속 50㎞로 내달리는 쾌속선에 몸을 싣고 목포항을 출발해 꼬박 2시간 내달려야 도착하는 그 섬을 나는 5년 만에 다시 찾았다. 5년 전 첫 방문이 단순 관광이었다면 이번은 목적이 따로 있었다. 자산어보(玆山魚譜) 유산을 찾아가는 여행이다.
자산어보는 정약전(1758~1816)이 집필한 한국 최초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다. 그는 조선 순조 원년(1801년) 천주교 박해사건인 신유박해 때 흑산도에 유배돼 1814년까지 머물렀다. 이어 1814년 우이도로 거처를 를 옮겼다가 1816년 사망했다. 흑산도에 머물던 시기 정약전은 흑산청년 장창대의 도움을 받아 총 226가지의 생물종을 담은 어보(魚譜)를 펴냈다. 집필 과정은 이준익 감독이 2021년 내놓은 동명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지난 7월 31일 오전, 여객선터미널로 마중 나온 이곳 토박이 이영일(57·자산어보 마을학교 대표)씨와 이른 점심으로 배를 채우고 답사에 나섰다. 고래 흔적을 찾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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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의 섬 흑산도… 곳곳에 고래 흔적
경어(鯨魚, 속명 고래어) : 고래는 철흑색에 비늘이 없다. 길이는 100척 남짓이며 간혹 200~300척도 잇다. 흑산바다에도 있다.
해돈어(海豚魚·속명 상광어) : 큰 놈은 10척 남짓이다. 몸통은 둥글고 길다. 색은 큰 돼지처럼 흑색이다. (…) 다닐 때는 반드시 무리가 따라다니며, 물에서 나올 때는 삑삑 소리를 낸다. 기름이 많아 한 마리에서 한 동이나 얻을 수 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에서 고래 3종을 다뤘는데 위 설명은 그중 일부다. “고래는 흑산바다에도 있다” “(상괭이는) 흑산에 가장 많이 산다”는 대목이 눈길을 끈다. 그렇다. 지금은 고래하면 울산 장생포를 떠올리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흑산 앞바다는 고래 천지였다.
용암에도 살아남는 독한 녀석들을 볼 수 있는 곳
이번 여름엔 도쿄의 남쪽 섬으로 향했다. 이 섬을 찾은 이유는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푸른 바다를 보며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이 섬에 얽힌 옛이야기가 궁금하기도 했다. 1933년, 이 섬에서는 공식적으로 129명(이즈오시마 공식 사이트) 또 다른 언론 보도로는 944명이 자살했다고 한다. 어째서 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섬에서 생을 마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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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액티비티를 즐길 수 있는 휴양지
도쿄에서 약 120km 떨어진 이즈오시마는 해저 분화로 생겨난 섬이다. 섬 자체가 아직도 활동 중인 활화산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 섬 전체가 이즈오시마 지질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섬으로 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도쿄 다케시바항에서 제트선을 타는 것이다. 푸른 물살을 헤치며 출발한 제트선은 1시간 45분 후면 이즈오시마에 도착한다.
이즈오시마의 면적은 91제곱미터로, 섬의 북쪽에서 남쪽까지 자동차로 일주하는 데는 약 한 시간 정도가 걸린다. 섬의 중심에는 거대한 활화산인 미하라산이 우뚝 서있다. 미하라산 정상에는 거대한 분화구가 있는데, 탐방객은 아직도 활동하는 활화산의 분화구를 바로 근처에서 살펴볼 수 있다.
미하라산뿐 아니라 섬 곳곳에는 화산 활동이 만들어낸 독특한 지형이 많다. 미하라 산의 북동쪽에는 일본 유일의 사막 지형인 우라사바쿠(裏砂漠)가 있다. 사막이지만 모래가 아니라 화산재와 스코리아로 뒤덮인 검은 사막이다. 이곳은 화산재와 화산가스의 배출로 식물이 자라기 힘든 환경이다. 때문에 마치 달표면에 올라선 것처럼 신비한 풍경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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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남서쪽에는 18,000년 동안의 화산분출물이 쌓여 만들어진 센바 지층절단면(千波地層切断面)이 있다. 1953년 도로 공사를 위해 산을 깎았을 때 나타난 줄무늬 지형인데, 그 겹겹이 쌓인 모양 때문에 바훔쿠엔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섬의 남동쪽 오타이네 해변에는 30m 정도의 뾰족한 섬이 있다. 붓 모양으로 생겨서 후데시마(筆島)라고 불리는데, 과거엔 하나의 화산이었지만, 오랜 비바람을 맞으며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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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남부는 하브(波浮)라는 작은 항구 마을이다. 이곳은 원래 마그마가 지하수와 만나 생겨난 둥그런 분화구였다. 하지만 1703년 발생한 쓰나미로 지형 일부가 무너지며, 지금처럼 바다와 연결된 모습이 되었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한때 어선과 관광으로 번성했던 지역이고, 과거의 영화는 옛 미나토야 여관(港屋旅館)에서 만나볼 수 있다. 당시에는 찾기 힘든 3층짜리 대저택인데, 어부와 관광객을 위한 숙박시설로 사용됐다.
현재 ‘이즈의 무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 <이즈의 무희>에 등장하는 유랑극단의 고향이 하부항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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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의 동쪽에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오시마 동물원과 삼나무 숲속에 자리 잡은 신비로운 하지카마 신사(波治加麻神社), 그리고 거대한 나무뿌리 사이로 통로가 있는 지형인 이즈미의 키리도오시(泉津の切り通し)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이게 다 돌이라고요? 하마터면 먹을 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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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진짜 음식인 줄 알았어요. 집어 먹을 참이었습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네요.”
“세상에, 이게 다 돌이라고요? 돌로 진수성찬을 차렸다고요?”
돌로 차린 수라상을 본 관람객들의 반응이다. 누구라도, 하나같이 감탄사를 토해낸다. 벌어진 입도 다물 줄 모른다. 뒤이어 들어온 관람객도 탄성을 지른다.
“와! 정말 잘 만들었다. 어떻게 만들었지?”
“만든 거 아니라는데요. 자연산 돌이라고 합니다.”
“정말요? 이게 진짜 돌이라고요?”
전시된 수라상을 쳐다보는 눈매가 더욱 빛난다. 인공의 흔적을 하나라도 찾아보겠다는 심산이다. 자연산이라는 말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하긴, 나부터도 믿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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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상만큼 큰 상에 갖가지 음식이 다 차려져 있다. 산해진미가 다 모인 것 같다. 후식으로 먹을 포도도 놓여있다. 진짜 포도 같다. 수라상 옆에 따로 전시된 소갈비와 돼지고기 삼겹살 덩어리도 돌이란다.
“이건, 대통령실 수석들이 먹는 고기인가요?”
“하하, 그렇게 얘기할 수 있겠네요. 국내산은 아닙니다. 중국산입니다.”
“외국 돌이 많은가요?”
“국내산과 외국산이 섞여 있어요. 화려하면서도 큰 돌이 주로 외국산입니다.”
박병선 관장과 주고받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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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크랩 가격이 이 정도? 잘 못 본 줄 알았다
노 캐시, 예스 eS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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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5주 간의 여행 동안 우리 가족은 현금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유로화와 달러화를 조금씩 준비해 갔으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순간까지 현금은 그대로였다.
캠핑장에서도 No Cash가 보편적이었고, 중요한 결제는 대부분 온라인에서 이루어졌다. 유로화를 사용하지 않는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도 환전이 필요한 순간도, 환전할 기회도 없었다.
여행 계획을 세우면서 노르웨이에 가면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의 초상화가 그려진 100크로네 지폐를 기념품으로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지나고 보니 100크로네 지폐를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여행 중에 인터넷 접속은 아주 중요하다.
나는 현재 베트남에 살고 있지만, 경제 활동은 여전히 한국이 중심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유심을 두 개 동시에 사용한다. 신용카드를 한국과 베트남 양쪽 모두 사용하고 있어서 결제 정보를 SMS로 받아야 했고, 때에 따라 필요한 본인인증 절차 문제도 있고, 업무와 관련된 연락도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간 유럽에 머물러야 하니 필요한 유심이 세 개나 되었다.
이럴 때는 eSIM을 사용하는 것이 매우 편리하다. 물리심(현지심)의 경우 유심칩을 바꾸려면 핀을 갖고 다니면서 뺐다 끼우기를 반복해야 하는데,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그 과정에서 유심칩을 분실하면 해외에서 재발급도 불가능해서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스마트폰은 대부분 두 개의 유심칩이 동시에 작동하는 Dual-SIM을 지원한다. 보편적으로는 칩을 직접 꽂는 물리심 1개와 전자적으로 등록하는 eSIM 하나를 지원한다. 그런데 eSIM은 하나가 아니라 더 많은 eSIM을 핸드폰에 등록할 수 있다. 여러 개의 eSIM 중에서 그때그때 내가 사용하고 싶은 것만 최대 2개를 활성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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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전자기기에 관심이 많거나, 해외 생활이 잦은 경우가 아니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복잡해 보이지만 여러 나라를 다니며 장기간 여행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라면 꼭 알아두는 게 좋다. 나의 스마트폰에는 물리심이 없다.
세 나라의 유심을 모두 eSIM으로 바꿔 놓았다. 유럽 여행 중에는 셀룰러 데이터 사용과 전화 통화를 위해 독일 보다폰 유심을 기본으로 설정해 두고, 신용카드 결제 정보를 SMS로 받기 위해 베트남 비엣텔 유심을 활성화해서 다녔다.
그리고 한국에서 본인인증을 해야 하는 경우에는 베트남 유심을 끄고 한국 유심을 켰다. eSIM은 터치 한 번이면 유심 교체가 가능하기 때문에 여행 중 유심을 등록해야 할 때는 꼭 eSIM으로 만들기를 추천한다.
유럽은 기본적으로 셀룰러 데이터가 자동 로밍된다. 하지만 본국에서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양과 로밍으로 사용하는 데이터양이 다르다. 유럽이 EU라는 이름으로 한 개의 나라처럼 느껴지지만, 엄연하게 다른 국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위스의 경우 유럽 내에서도 데이터 로밍이 안 된다. 스위스에서는 스위스 유심을 넣어야만 셀룰러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eSIM은 굉장히 훌륭한 해결책이다. 처음 유심을 등록할 때 “eSIM please.” 한 마디만 하면 유심칩 대신 QR코드를 갖고 와서 사진을 찍어 등록하니까 어려운 것도 없다.
극락보전을 세운 왕실의 뜻을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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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륵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의 말사) § 주소: 경기 여주시 신륵사길 73 § 대표 문화유산: 신륵사 조사당, 다층석탑, 다층전탑, 보제존자석종, 보제존자석종비,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이상 보물) 극락보전, 극락보전 삼장보살도(이상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 탐방일: 24. 6. 18. |
이번 여름 탐방은 그 어느 때보다 재밌는 문화유산 탐방이 될 것이라는 강한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바쁜 생업에 쫓겨 제대로 문화유산을 만나지 못한 작년의 아쉬움을 올해 다 쏟아내려고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무더위가 예고되었지만, 그 정도 더위는 내 문화유산 탐방의 열정을 달구는 연료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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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의 첫 탐방지는 신륵사였다. 최근 몇 년 동안 서너 번쯤 찾았던 곳이다. 출발지 광혜원에서 차로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신륵사. 주차장, 일주문을 지나 불이문 앞에 다다르니, 익숙한 풍경이 사뭇 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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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열려 있던 불이문 앞의 찻집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직 개점 전인가 싶어 문 앞에 다가가니, 경내로 이동했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사라진 찻집 대신 눈에 띈 것은 새로운 토끼 사육장이었다. 한때 찻집 뒤뜰에서 자유롭게 뛰놀던 토끼들이 이제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스님이 토끼 사육에 갑자기 취미를 붙이신 걸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친다.
현존 유일의 고려시대 전탑
신륵사는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무려 8개의 보물을 소장하고 있는데, 필자의 관심을 끄는 문화유산은 다름 아닌 ‘다층 전탑’이다. 우리나라에 탑이 많이 있지만, 대부분은 석탑으로, 전탑(벽돌탑)은 매우 드물다. 실제로 문화유산포털에 등록된 석탑은 500건이 넘지만, 전탑은 고작 7건에 불과하다. 특히 이 다층 전탑은 유일한 현존 고려시대 전탑이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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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문을 넘어 남한강을 오른쪽에 두고 느긋하게 10분 정도 걷는다. 구룡루가 보인다. 구룡루를 넘어가지 않고, 우측으로 돌아, 가장 관심 있는 다층 전탑을 향해 계단을 오른다. 계단이 넓직하고 경사도 완만하다. 한 발씩 디디며 전탑까지 오른다. 전탑 앞에 이르니 전탑 뒤로는 남한강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그 강 위로는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뽈뽈뽈 떠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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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탑은 으뜸 법당이나 전각 앞에 있기 마련인데, 신륵사 다층전탑은 특이하게 강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를 두고 사진지리학자 이성수는 강한 강바람이 경내로 들이치는 걸 완화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이성수, <신륵사의 풍수입지와 바람길에 대한 연구>,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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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여행에서 절대 놓치면 안 되는 곳
경북 영양을 처음 밟은 건 단순한 우연이었다. 업무차 정선과 삼척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위성지도를 보며 어떤 길에서 더 낭만적인 해찰을 포함할 수 있을지 가늠 중이었다. 얼핏 봐도 첩첩산중이며, 깊은 골짜기가 곳곳에 펼쳐진 곳이 눈에 들어왔다. 울진과 안동 사이의 짙푸른 산등성이들이었다.
그 이름도 강렬한 왕피천도 살짝 구경하고 이름나지 않은 작은 절경에 마음을 빼앗겨 영양군에 이르러서는 밤이 되어버렸다. 차 속에 아무 곳에서나 잠을 청할 수 있도록 간단한 이부자리가 펴져 있는지라 적당한 자리를 찾아서 쉬었는데 그곳이 공교롭게도 서석지였다. 우리나라 3대 정원이라는 그곳.
아침에 부스스 일어나 잠시 산책 삼아 눈앞의 마을을 거닐었다. 때마침 연잎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향기를 찾아가 열린 대문을 통과했더니 눈앞에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연못을 품은 고택이 펼쳐졌다. 예상치 못한 절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반적인 여행이 소개팅이라면 서석지와의 첫 대면은 그야말로 운명적인 만남이었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름다움에 기습 공격을 당해 비틀거리는 마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압도적인 풍경을 맞닥뜨렸다. 입암이라고도 하는 선바위 뒤에 있는 거대한 V자 절벽이었다. 흔한 팻말도 없어서 인터넷을 뒤져보니 ‘남이포’라는 이름이 붙어있었다. 언젠가 꼭 날을 잡아서 영양을 천천히 돌아보리라 다짐했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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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여행은 ‘의(義)식주’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인지 싶다. 영양 여행은 ‘의(義)식주’다. 약간은 유머를 더한 표현이다. 의식주 중 하나는 통상적인 의미를 벗어난다. ‘식’은 음식이다. 장계향이라는 인물을 주제로 하여 정갈한 한식상을 맛볼 수 있다. ‘주’는 고택 체험이다. ‘의’는 옷이 아닌 ‘옳을 의’자를 써봤다. 조지훈 시인의 진정한 면모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이곳을 찾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면서 천천히 알아보니, 영양은 고풍스러운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서는 단체예약을 통해 최초의 한글음식조리서를 집필한 장계향의 정신을 계승한 한식의 정수를 배울 수 있다. 더불어 ‘정부인상’, ‘소부상’으로 불리는 한정식을 예약해서 맛볼 수도 있다.
분명 여긴데… 만년설이 사라졌다
천산과 눈 맞춤하며 아침을 시작한다. 낮게 내려앉은 흐린 구름 사이로 천산이 환히 빛난다. 서울은 아직 불볕더위라는데 알마티에서 맞는 서늘한 아침이 고맙다. 매일 아침을 천산과 함께 하는 이들은 어떨까. 때 묻지 않은 현지인들의 순박한 심성 속에 천산이 들어앉았다. 오늘은 도심을 벗어나 순정한 자연과 만난다.
오길 잘했다, 아씨 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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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Assy 고원과 콜사이Kolsai 호수, 차른Charyn 협곡은 국립공원이다. 거친 바람이 매만진 광활한 초원과 만년설이 녹아 이룬 손 시린 호수, 그리고 오랜 시간 물과 바람이 빚은 붉은 협곡. 알마티를 찾는 이들은 이곳에서 자연의 위대함과 자연의 고귀함을 동시에 경험한다. 누구라도 압도적 풍광에 마음을 열고 하늘을 우러른다.
시가지를 벗어나자 양옆으로 황량한 벌판이 끝도 없다. 막막하다는 말도 모자란다. 감동적인 것은 수백km를 달려도 천산산맥이 수호신처럼 따라오는 것이다. 그 산맥을 중심으로 국경이 나뉘고, 사람들은 마을을 이루어 삶을 꾸리고 있다. 우리는 김제 평야를 유일한 지평선이라며 호들갑떨지만 카자흐스탄에서는 사방이 지평선이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고 했던 이육사의 ‘광야’를 떠올리며 달렸다. 드디어 아씨 고원으로 오르는 투르겐Turgen 국립공원에 들어섰다. 이곳부터는 비포장 산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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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 고원은 해발 3000m에 비단처럼 펼쳐있다. 흙먼지를 피우며 40여 분 산길을 올랐다. 산길을 오르는 내내 청량한 계곡물 소리가 포효했다. 이런 곳에 평원이 있을까 하고, 조바심을 낼 즈음 거짓말처럼 시야가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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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어여쁜 아씨 고원이다. 유려한 능선과 툭 트인 벌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스라한 산맥은 키르기스탄, 타지키스탄으로 아스라하니 이어진다. 말과 양, 소 떼, 그리고 유목민들이 거주하는 흰색 게르가 구름처럼 떠 있다. 초원에 서서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렸다. 야생화 향기와 멀리서 달려온 바람이 온몸을 휘감고 지났다. 순간, 오기를 잘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정상에서 유목민 아이들을 만났다. 붉은 볼을 어루만지고 꼭 껴안아줬다. 가난의 대물림이 그들에게서 멈추고, 천산에서 키운 고운 심정이 빛바래지 않았으면 했다. 이방인의 부질없는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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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선을 타고 한 시간여를 걸었다. 내려오는 도중 갑작스러운 비를 만났다. 고원에서 맞는 비는 차갑지 않고, 오히려 반가웠다. 초원이라 시야가 확보됐기에 길 잃을 염려는 없었다. 아름다운 초원은 막상 걸어보니 온통 말똥, 소똥으로 뒤덮인 지뢰밭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는데 내게는 아씨 고원이 그랬다. 그래도 걷기를 잘했다. 비를 맞으며 걸은 아씨 고원은 벅찬 감동이었다.
다른 행성에 도착한 환상
미국 입국 심사를 왜 캐나다에서 하는 거지?
얼마 전, 우연히 북한 주민을 인터뷰 한 외국 매체의 방송을 보게 되었다. 그 내용을 말하자면, 기자가 “당신이 평생 딱 한 곳만 가볼 수 있다면 어느 나라를 여행하고 싶나요?”라고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 주민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어떤 곳이기에 우리 인민을 이렇게 힘들게 만드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우리 입장에서는 다소 엉뚱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언젠가 한 번쯤은 세계 최강 미국에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슴 한편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은 만국 공통일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그랬다. 그래서 지난 5월, 빠듯한 형편이었지만 버킷리스트의 달성을 위해 미국으로 향했다.
미국으로 가는 길은 참으로 험난했다. 우호국인 우리나라 국민들은 미국을 여행할 때에 비자(VISA)를 받을 필요가 없이 비자면제 프로그램(ESTA)으로 대체가 가능하다. 그런데 말만 면제이지, 2시간 가량 컴퓨터 앞에서 호구 조사를 거쳐야 하고, 통과 여부를 장담할 수 없다. 무비자에 익숙한 우리 입장에서는 불편한 건 마찬가지다.
간혹 입국이 거절된 사례들도 계속 눈에 띄었다. 나 역시 추방 당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입국 심사 예상 질문과 그에 적절한 답변을 영어로 출력해 달달 외웠다. 또 현찰 없이 카드만 들고 가면 불법체류 의도가 있다고 오해를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분실의 위험이 있지만 1,500달러를 환전하여 현금으로 준비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저렴한 비행 편을 택하느라 어쩔 수 없이 직항이 아닌 캐나다 밴쿠버를 경유해서 로스앤젤레스(LA)에 도착하는 여정을 택했다. 경유지인 밴쿠버에서 환승을 위해 서둘러 탑승구로 갔다. 기내에서 다시 한번 입국심사 연습을 하려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이게 웬걸. LA가 아닌 캐나다 밴쿠버에서 뜬금없이 그 악명 높은 미국 입국심사를 받게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라 너무 당황스러웠다. ‘젠장… 도대체 왜 미국 입국 심사를 캐나다에서 하는 거지?’
중년의 백인 남성인 입국 심사관은 내게 “며칠 동안 체류할 것인지?”, “얼마를 소지하고 있는가?”와 같은 뻔한 것들을 물었다.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나였지만 미리 공부를 하고 갔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예상 외로 일이 술술 풀리니 만족스러워 미소가 절로 머금어졌다. 그런데 갑자기 심사관은 내 손을 가리키며 쥐고 있던 종이를 달라고 했다. 입국 심사를 대비하기 위해 미리 작성해 간 예상 문답지였다.
‘이걸 왜 달라고 하지… 미리 준비한 답변이라고 진정성을 의심하면 어떡하나.’ 입국이 불허 될까 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사내의 단호한 표정에 다소 겁을 먹기는 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종이를 건넸다. 그런데 나는 포커페이스가 안 되는 타입이라 심사관이 오해할 것이라는 생각에 그저 망했다며 단념하기 시작했다.
심사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종이를 응시했다. 점점 미간이 찌푸려졌다. 어느새 180도였던 눈썹의 각도는 45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항공권과 호텔에 큰돈을 지출했는데 모두 공중분해될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 호탕한 웃음이 들려와 눈을 번쩍 떴다. 그는 내게 어디를 갈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순진한 표정으로 디즈니랜드 예매권을 보여주었다. 불법 체류의 의도가 있는 사람은 보통 값비싼 관광지를 예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이 주효했는지 그는 행운을 빈다며 나를 풀어 주었다(?).
이게 뭐라고…뉴욕 다이소까지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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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여행 가는데 꼭 챙겨야 할 게 뭐야?”
만약 누군가 뉴욕 여행에 대한 조언, 그러니까 꼭 챙겨 가야 하는 필수 아이템에 대해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이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명확히 안다. 바로 ‘돗자리(mat)’다. 좀 의아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재고의 여지는 없다. 융통성을 발휘하자면, 반드시 돗자리가 아니더라도 ‘식탁보’를 비롯해서 널찍하게 펼쳐서 깔고 앉거나 누울 수 있는 그 무엇이라도 가능하다.
뉴욕 여행을 가는 데 왜 돗자리가 필요하냐고? 왜냐하면 곳곳에 널린 ‘공원’들 때문이다. 격자형으로 쭉 뻗은 뉴욕 도심을 걷다보면 곳곳에서 공원을 만날 수 있다.
그 유명한 센트럴 파크를 비롯해 낭만 가득한 브라이언트 공원, 분수가 매력적인 워싱턴 스퀘어 파크, 그린 마켓이 들어서는 유니언 스퀘어 파크, 플랫 아이언 빌딩이 보이는 매디슨 스퀘어 파크 등 각 공원마다 저마다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뉴욕의 공원은, 그곳이 어디든 간에 똑같은 풍경이다. 푸릇한 녹지 위에 ‘자유’와 ‘여유’가 펼쳐져 있다. 돗자리나 식탁보, 요가 매트 등을 펴고 자리를 잡은 뉴요커들이 챙겨온 음식과 음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나란히 누운 커플들이 담소를 나누며 달콤한 사랑을 속삭인다.
한쪽에선 원반 던지기나 럭비공 놀이를 하는 청년들도 있고,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는 여성들도 있다.
시선의 자유, 타인은 신경 안 쓰는 뉴요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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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한가운데에서는 상의를 탈의한 근육질의 뉴요커들이 일광욕을 즐긴다. 여기가 도심 안의 공원인지 해수욕장인지 헷갈릴 정도이다.
가장 놀랐던 건 공원 속 뉴요커들이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배가 불룩 나온 아저씨도 과감히 상의를 벗어버려도 되고, 수영복만 입고 공원을 활보해도 되는 곳이 바로 뉴욕의 공원이다. ‘완벽한 자유’라고 부를 만했다.
여행 5일째,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에 들렀다가 센트럴 파크를 가로지르게 됐는데, 저마다의 방식으로 공원을 즐기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부러웠다.
그들이 발산하는 풍요로움을 나도 경험하고 싶었다. 나 또한 그 자유로움 속에 녹아들고, 한가로움 속에 잠겨 있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떻게 뉴욕의 공원을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결국 아내와 함께 결정했다.
‘우리도 여기 자리 잡고 누워버리자!’
현재와 과거, 동양과 서양이 공존하는 곳
골목을 지나칠 때마다 어김없이 자극적인 향신료 냄새가 코를 찔러온다. 매운 카레 가루의 향과 비슷하지만 더 지독한 편이라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잊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거리를 걸어본다.
건물마다 외벽에 촘촘히 매달려 있는 엄청난 숫자의 에어컨 실외기들이 눈에 들어온다. 신기하지만 한편으로 상당히 기괴해 보인다. 환 공포증이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았다.
바로 그 옆에 시공 중인 건물은, 금속이 아닌 대나무를 지지대로 사용하고 있었다. 무너질까 염려되어 다른 길로 돌아가지만, 다른 곳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홍콩 여행의 첫 날은 유쾌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피할 수 없어, 좀처럼 여행 기분이 나지 않았다.
지난 5월에 도착한 홍콩은 선선하지만 때로는 덥기도 한 종잡을 수 없는 날씨로, 여행의 시작부터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현지인들도 옷차림이 각양각색이었다. 또 영어를 쓰다가도 광둥어(중국어 방언)를 사용하며, 현대적인 고층 빌딩들 사이로 20세기의 느낌이 물씬 풍기기도 한다.
폭염을 피해 떠난 북방의 대초원 몽골 여행
여름에는 정말 미심쩍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닐까.
중지되고 정체되는 감각.여름을 제일로 사랑했다면
다르게 느꼈을지도.
하지만 여름은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세 번을 거쳐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나는 여름의 하늘을 조금 사랑한다.
당당하고 등등한 푸름을,
푸름을 가벼이 저버리고 소나기를 내리는 패기를,
패기를 무효하는 천진한 무지개를.나는 여름밤을 조금 사랑한다.
흙과 풀과 낮은 끈기가 뒤섞인 냄새를,
짝을 찾는 맹꽁이의 전심전력의 소리를,
한바탕 꿈을 꾸기에 알맞은 짧음을.나는 여름밤의 물기 많은 과일을,
헐거운 옷 속으로 들어오는 낮은 바람을,
오수에 빠진 사람과 동물의 방심한 얼굴을
조금 사랑한다.– 한정원 「내가 네 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중에서
네덜란드 사람이 7년 유배 당한 곳
네덜란드 출신의 핸드릭 하멜(?~1692) 일행이 표류해서 조선에서 겪은 이야기를 쓴 <하멜표류기>가 있다. <하멜표류기>는 조선을 서구세계에 최초로 알린 표류기로 유명하다.
하멜 일행은 조선에서 13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하다가 나중에 일본의 나가사키로 탈출 고국으로 돌아갔다. 이 무렵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관리들이 우리나라의 도자기에 주목하고 조선과 도자기 무역을 검토한 적이 있었다.
16세기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필두로 하여 대항해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다. 뒤를 이어 17세기는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이 앞다투어 무역의 길을 찾아 새로운 미지의 나라를 향해 떠났다.
제주도에 표착한 하멜
1653년(효종4년) 6월 18일,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스페르베르’ 호는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고 있었다. 당시 네덜란드와 일본은 무역을 하고 있었다.
이 배에는 1651년 동인도회사에 서기로 취직해 있던 핸드릭 하멜이 타고 있었다. 하멜 일행은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항해하던 도중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8월 16일 제주도에 불시착하게 된다.
태풍을 만난 시기가 우리나라에서 태풍이 자주 발생하는 시기인 것으로 보아 중간에 태풍을 만나 표류하다 제주에 표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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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멜 일행이 탄 네덜란드 무역선인 스페르베르호는 심한 폭풍우에 난파되어 선원 64명 중 36명이 제주도에 표착한다. 이들은 제주도 관원들에 붙잡혀 제주 감영에 억류되었는데 다음해인 1654년 5월 탈출을 시도하다 붙들려 이 때문에 서울로 압송당하게 된다. 이들이 압송되어 간 루트를 보면 제주에서 출발하여 육지의 해남을 거쳐 나주, 장성, 공주를 거쳐 한양으로 가게 된다.
그런데 하멜 일행이 서울로 압송되어 왔을 때 한양에는 하멜과 비슷한 경로로 26년전 표류해 와 있었던 네덜란드인 벨테브레(1596~?)가 있었다. 한국 이름이 박연으로 알려진 벨테브레는 대포를 만드는 등 병기 개발에도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병자호란에도 참전하여 그와 함께 온 동료 2명이 전사하기도 하였다. 벨테브레는 조선에 귀화해 조선인 여자와 결혼 두 명의 자녀도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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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데 가는 곳마다 현대, 기아차… 여긴 어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고산 영봉과 눈부신 만년설은 서울에서 불볕더위를 잊게 했다. 비행기 트랩을 나서는 순간, 멀리 천산산맥과 폐부를 찌르는 청량한 바람이 성큼 다가왔다. 드디어 중앙아시아 초원에 들어섰음을 몸으로 체감한 순간이다.
중앙아시아 최대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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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카자흐스탄은 1992년 수교 이후 30년 넘게 교류해온 오랜 친구이자 각별한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여러 종교와 120여개 민족이 어울려 사는 카자흐스탄은 공존의 땅이고 융합의 땅이다. 나아가 원소 주기율표에 있는 모든 자원을 보유한 자원 부국이자 만년설과 초원, 호수, 사막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자연 부국이다.
스탈린 시대 연해주에서 강제 추방당한 고려인은 이곳에 첫 기착했으며, 지난해 논란을 빚은 홍범도 장군 묘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었다. 지금도 4만여 명에 달하는 고려인들은 유랑의 아픔을 안고 삶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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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Almaty는 중앙아시아 최대 도시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뒤 수도로서 역할하다 1997년 12월 아스타나Astana에 그 자리를 내어줬다. 아스타나가 행정수도라면 알마티는 경제수도다. 남한 면적 27배에 달하는 카자흐스탄 인구는 2,000여만 명으로, 도심을 벗어나면 좀처럼 사람 만나는 게 쉽지 않다. 국토 절반 이상은 황량한 불모지다.
알마티는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번성하고 화려하며 활기차다. 금융과 교육, 문화, 역사를 아우르는 알마티는 초원만 생각했던 이들에겐 의외다. 소련 시절 낡은 공공건물과 함께 현대적인 아파트와 고층 빌딩이 뒤섞인 알마티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핫한 도시다. 다국적 기업과 프랜차이즈 카페, 세련된 레스토랑은 이곳이 유목민들이 양치며 말 몰았던 초원이 맞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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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마을에 가서 ‘신선 자리’에 앉아봤습니다
뿔난 지구가 우리에게 경고장을 던졌다고 생각한다. 경고장은 어쩌면 조만간 ‘(인류) 퇴장’이 될 지도 모른다.
며칠전 ‘처서’가 지났다. 처서(處暑)는 24절기 중 열넷째로 본격적으로 가을이 자리 잡는 때이다.
예전에는 이때쯤이면 여인들은 여름동안 장마에 눅눅해진 옷을 말리고, 선비들은 책을 말렸다고 한다. 아무리 더워도 절기가 오면 거짓말처럼 더위가 사그라들었는데 올해는 무더위가 계속이다.
더위를 피해 산바람 맞으러 도락산으로 향했다. 선암계곡 주변에 댐 건설 계획이 발표됐는데, 발표 뒤 주변 풍경이 궁금해서였다(지난 7월 30일 환경부에서 전국 14곳에 댐 건설을 추진하자 지역에서 반발이 나오는 등 논란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편집자 주).
더구나 이상기후에 식지 않는 더위를 ‘이열치열’로 즐겨보자는 마음에 도락산 등산을 가게 됐다.
단양8경으로 꼽히는 이 곳
도락산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가산리 소재로 소백산과 월악산 사이에 걸쳐있는 965.5m의 바위산이다. 일부가 월악산국립공원 내에 포함되어 있다.
도락산이란 이름은 우암 송시열선생이 붙여주었다고 한다. “깨달음을 얻는 데는 나름대로 길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또한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사인암, 상선암, 중선암, 하선암 등 단양팔경 중 4경을 가까이에 두고 있어 주변경관이 빼어나다.
단양시가지를 벗어나 선암계곡길에 이르렀다. 나무그늘이 시원한 도로를 달리며 도로옆 계곡소리를 듣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풀벌레소리, 계곡소리, 자동차소리가 악기가 되어 연주한다. 조화롭게 어울리는 소리가 웅장하고 아름답다.
8시가 조금 못 미치는 아침 시간, 물놀이하기엔 아직 이른 시간인 듯한데 저 멀리 엄마, 아빠손을 잡은 남매가 아장아장 물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모습이다. 도로 건너편 오토캠핑장의 여유로운 아침 풍경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상선암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등산안내도를 살폈다. 초보 등산객에겐 길을 익히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길치, 방향치인 내겐 더욱 그렇다. 제봉으로 올라가서 채운봉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상선암주차장-제봉-신선봉-정상-도락산삼거리-채운봉-상선암주차장. 가늠해 보니 대략 6.8km이다.
상선암주차장 이용 시 주차비를 받는데, 이날은 ‘주차장 공사 중’으로 무료였다.
높은 지대에 위치, ‘신선마을’이라고 적힌 비석이 마을과 잘 어울린다. 등산 초입에 ‘OO가든’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최근 허영만의 식객 촬영지였다고 한다. 나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켰다.
작은 사찰을 지나자 산길이 맞아준다. 나무그늘과 흙길이 심신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나무사이사이로 내리쬐는 햇빛이 숲을 더욱 푸르게 해준다. 흙길에 떨어진 푸른빛 도토리와 밤송이는 후회 없이 막바지 여름을 즐기고 있고, 키 큰 나무에 매달린 열매는 뜨거운 태양을 견디며 가을을 맞이하리라.
50여 명이 모두 침묵하면서 함께 걸어다닌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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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4일(토요일) 김제 금산사 전북불교 미래본부에서 주최한 ‘걷기순례 잇다’ 행사가 있었다. ‘도시와 농촌을 잇다, 붓다로 잇다’는 표어로 지역의 구석구석을 걷는 순례 모임 성격이었다.
이날 행사는 전주혁신도시의 수현사를 출발하여 남원 만복사지, 선원사와 덕음암을 탐방하고 임실 진구사지를 거쳐 수현사로 되돌아가는 여정이었다. 수현사의 불교대학 재학생을 중심으로 하여, 남원 실상사, 선원사와 덕음암의 스님들이 이 행사에 함께하였다.
아침 안개 자욱한 곳에서 모이다
임실 지역의 행사라, 참가자들은 아침에 임실 진구사지에서 모였다.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임실 진구사지에는 아침 안개가 자욱했다. 폐허가 된 가람 터를 지키고 있는 우람한 석등(5.20cm) 위로 둥근 동산이 아침 안개를 배경으로 둥그스름한 광배를 이루었다. 자연스러운 동산과 인공 구조물 석등이 조화로운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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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행사에 사찰들의 역사문화 유산을 해설하는 문화해설사로 참가했다. 임실 진구사지에서 차량으로 50분 동안 44km 거리를 이동하여 남원 만복사지에 이르렀다.
전주 혁신도시 수현사를 출발한 버스가 20여 명의 참가자를 태우고 도착하였고, 남원 지역의 여러 사찰에서 참가자들이 차례로 도착하면서 ‘걷기순례 잇다’의 전체 참가자는 50여 명으로 불어났다.
만복사는 남원시 용정동의 기린산에 고려시대에 창건된 1목탑 3금당의 웅장한 사찰이었다. 조선 세조 때 김시습이 한문소설 <만복사저포기>를 지은 배경지로 유명하다. 이 사찰은 정유재란(1597년) 남원성 전투 과정에 왜군에 의해 방화되어 폐허가 되었다. 현재 국가유산으로는 오층 석탑, 석좌대, 당간 지주, 석불 입상과 석인상 등 석재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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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들은 만복사지의 석불 입상이 모셔진 전각에 모였다. 스님은 우리 지역 사회의 어려운 현실을 함께 고민해 보기 위해 이번 행사를 계획하였다고 입을 열었다.
지역 사회가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처해 있고, 고령화 등 사회적인 현상들로 우리 지역이 굉장히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한 게 현실이다. 이런 현실에서 도시와 농촌을 이어 함께하는 방안을 찾는 첫걸음으로 순례 모임을 마련했다는 설명이었다.
‘너와 나의 무엇을 잇고, 또 지역과 사찰도 잇고, 또 지역과 사회도 잇고, 지역에 있는 마을 사람들끼리 또 잇자’는 이야기, ‘있는 것들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폐허가 된 사찰의 작은 전각에서 내게는 진정한 울림으로 전해졌다.
남원시의 서쪽에 있는 만복사지에서 남원시의 중심지를 지나 선원사까지 2.5km와 선원사에서 덕음암까지 1.1km의 두 구간을 걷기 순례 참가자들이 걸어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8월 하순의 무더운 날씨로 인해, 일단 선원사까지는 차량으로 이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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